[연성교환/장편] 1차 고정틀 타입

이 세상에는 마법이 존재했다. 그렇기에 어려웠던 일도 쉽게 해결 할 수 있으며 대단한 능력을 갖춘 사람은 다친 사람을 치료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 마법이 녹아든 세상 속에서 마법을 잘 다룰 수 있도록 도와주는 곳이 있었는데, 그곳이 바로 아카데미였다.

"여기가 아카데미..."

B는 자신의 마법 능력을 잘 조절하고 향상할 수 있도록 아카데미에 입학했다. 이유는 그것뿐만은 아니었다. 공작가의 딸인 자신이 그 유명한 아카데미에 가지 않으면 뒷말이 나올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부모님이 보내신 거기도 하니 B는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부모님의 말씀을 따를 뿐이었다. B는 애초에 부모님이 자신을 강제로 아카데미에 보내도 상관이 없었다. 부모님이 시키시는 일인데 안 할 수도 없었고. 아카데미의 정문을 들어서니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유명한 귀족 집안의 자제들부터 유명하지는 않지만 귀족처럼 보이는 이들과 조금 허름한 옷을 입어 평민처럼 보이는 이까지. 마법을 쓸 수 있다면 누구나 들어 올 수 있는 것이 아카데미였다. B는 많은 학생들 사이를 힘겹게 지나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 입학 첫날이라고 해도 수업이 한 가지 있다고 전해 들었고 수다를 떨 만큼 친한 친구는 아직 없었기에 수업 준비를 하려고 했다. 강의실 문을 천천히 열자 교실 안으로 텅 비어있었다. 한 자리만 빼고.

"아, 아직 교수님께서는 안 오셨어요."

"아, 네..."

B는 얼른 빈 자리 아무 곳에나 앉았다. 그렇게 B는 앉자마자 수업이 필요한 자료들과 준비물을 꺼내고는 준비가 다 끝나자 가만히 수업이 시작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에게 말을 걸었던 남자 또한 창가를 구경하고 있었고. 그렇게 각자 기다리고 있자 텅 비었던 교실에는 하나둘 학생들이 차기 시작했고 큰 종소리가 울리자 마지막 수업을 가르쳐주실 교수님이 들어오셨다."

"아카데미에 입학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앞으로 여러분은 저에게 다양한 마법을 배울 겁니다. 자신의 마법을 조절 할 수 있는 능력까지도요."

그렇게 교수님이 한참을 학교에 대하여 여러 가지 소개하고 나서야 겨우 수업에 들어갈 준비를 했다. 칠판에 천천히 적히는 것은 '기초 마법 이론'이었다. 그리고 아래에도 무언가가 적혔는데...

"첫 수업이니 같은 클래스 친구들에 대해서 잘 모르죠? 이번 수업은 조별 과제로 이뤄집니다. 여러분은 학교 도서관을 이용하여 기초 마법의 이론을 정리해서 오세요."

모두가 놀라서 수군거릴 때 B 혼자만 조용히 있었다. B는 조별 수업을 하는 것도 학교에서 시키는 일이니 하는 것이었고 다른 아이들과 수업을 해도 수업을 방해만 안 하면 되었다. 그렇게 교수님이 수업에 대하여 설명을 끝마치고 각자 함께 할 파트너를 칠판에 적어주셨다. 파트너를 다 적자 다시 한번 수업 전에 들었던 종소리가 울렸고 교수님은 그 소리를 듣고는 다른 설명은 다음 수업에서 하겠다면 수업을 마치신 후 강의실을 나가셨다. B는 자신의 파트너를 확인하기 위해서 칠판에 가까이 다가갔다. 자신의 이름과 함께 적힌 이름은 'A'라는 이름. 이름은 확인해도 얼굴을 몰랐기에 누구인지 찾으려고 뒤를 돌아본 순간 자신의 눈앞에는 아까 수업 전 말을 걸었던 백발의 남자가 서 있었다.

"이런 우연이 다 있네. 파트너인 A입니다."

그는 싱긋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그 웃음에는 정말 반가워서 웃는 것보다는 형식적인 웃음에 가까운 것 같았다. B는 "B에요."라고 짧게 말한 뒤 입을 그만 다물어버렸다. A는 B의 풀네임을 듣고는 조금 놀라는가 싶더니 이내 표정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아마 그녀의 풀네임을 듣고 공작가 집안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겠지.

"저희는 바로 도서관으로 가실까요? 일찍 끝내는 게 훨씬 좋을 거예요."

자리를 옮기려는 B에게 A는 제안을 했다. 먼저 도서관에 가서 수업 과제를 끝내자고. A도 무리한 제안은 아니었기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수업 자료를 들고 둘은 도서관으로 향했다.


"도서관은 여기인 것 같군요."

둘은 복도를 한참은 걸어서야 저 끝에 있는 도서관에 도착했다. 도서관 문은 다른 교실들의 문과 정문과 마찬가지로 꽤 화려하고 거대했다. 문을 조심스럽게 열자 안으로 거대한 책장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물론 도서관이기에 책이 없는 것이 더 이상하겠지만 이렇게 많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B가 멍하니 있자 A는 혼자 걸어가 책상에 앉으며 말했다.

"그렇게 멍하니 있는 것보다는 빨리 와서 자료를 찾는 게 다음 수업 때 더 좋을 것 같은데요."

그제서야 B는 정신을 차리고 얼른 A의 옆자리에 앉았다. A는 그녀에게 "저는 기본 마법 속성인 물, 불에 대해서 찾을 테니 당신은 땅, 바람에 대해서 알아봐 주세요."라고 말하고는 그대로 자신이 잡은 책에 집중하였다. B는 A의 옆자리에서 그가 보고 있지 않은 책을 골라 A가 정해준 분량인 땅, 바람 속성에 대해서 알아보기 시작했고 한참이 지나도록 둘은 아무 대화 없이 책만 뚫어져라 바라보며 필기하고 다시 책을 보는 것을 몇 번 반복하였다. 반복하는 것이 끝나자 반대편에 있는 창가에서는 해가 점점 져가며 도서관 전체를 붉게 물들게 하고 있었다.

"시간이 많이 늦었군요. 어서 돌아가는 것이 좋겠어요."

A는 자신의 짐을 챙기고는 벽에 몸을 기대어 B를 바라보았다. B는 먼저 가지 않고 빤히 자신을 바라보는 A가 조금 신경 쓰였기에 그에게 물었다.

"먼저 안 가고 뭐 하세요?"

"여자 혼자 둘 수는 없죠."

"여자 기숙사로는 못 들어가잖아요."

"기숙사 문 앞까지는 데려다줄 수 있는데. "

"...... 괜찮아요."

B는 그렇게 말하며 여전히 형식적인 감정 없는 웃음을 짓는 A에게 한참을 입을 다물고 있다가 짧게 거절 의사를 표현하고는 그런 A를 내버려 두고 자신의 짐을 빨리 챙겼다. 짐을 챙기고 서둘러 도서관 밖으로 나오자 복도는 꽤 어두운 상태였고 뒤에는 A가 따라 나왔다. B는 A를 무시하고 천천히 복도를 걸어가기 시작했다. 어두워서 바닥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혹시나 돌에 걸려서 넘어지면 큰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어두워서 넘어지는 것보다 신경 쓰이는 것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A가 자신의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만 따라와 주실 수 없나요?"

"남자 기숙사도 같은 방향이에요."

B가 그 말을 듣고는 잠깐 황당해하고 있자 A는 자신도 모르게 "풉...!" 하고는 웃음소리를 내고 말았다. B가 그 웃음에 A를 빤히 바라보자 그는 언제 소리 내어서 웃었냐는 듯 다시 입만 웃는 표정으로 돌아왔다.

"아, 죄송합니다. 실례했군요."

"이번에는 제대로 웃었네요. 항상 텅 비어있었는데."

"... 그게 무슨 소리죠? 텅 비었다니?"

A가 조금 표정이 굳은 상태로 B에게 물어보자 B는 친절히 설명해주었다.

"아까부터 형식적인 웃음만 짓고 있었잖아요. 아무 감정 없이 연기하는 듯한 표정으로.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 할 때도 그렇고요. 마치 웃는 표정의 가면을 쓴 것처럼요."

그 말을 들은 A는 표정이 점점 딱딱하게 변하는 것을 느끼고는 서둘러 다시 웃어 보였다.

"이상한 말씀을 하시네요. 피곤하니 먼저 가보겠습니다."

그렇게 자신을 지나치고 가는 A를 빤히 바라보다가 B 또한 서둘러 자신의 기숙사로 향하였다.


다음날, 수업을 마친 후 점심시간인지라 B는 식사를 하기 위해서 식당으로 향했다. 아직은 그렇게까지 막 친해진 인물이 없기에 혼자 식당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식당에 도착하자마자 보이는 것은 어제 피곤하다며 먼저 가버린 A였다. A가 B는 눈이 마주치자 A가 먼저 가볍게 고개를 까닥하고는 인사했고 B 또한 그 인사를 받아주었다. 둘은 인사만 하고 A는 다른 학생들과 함께 식사를 하러 갔고 B는 창가 쪽 자리에 앉아서 혼자 식사했다. 식사가 끝난 B는 곧 있을 수업 준비로 강의실로 가려고 식당에서 나오자 거기에는 어제와 똑같은 자세로 벽에 기대어 자신을 바라보는 A가 있었다. A는 천천히 B에게 걸어와 말했다.

"잠시 대화 가능할까요?"

"다음 수업 준비를 해야 해서-."

"아직 점심시간은 많이 남았잖아. 그러니까 잠깐 얘기해요."

A는 B의 손목을 잡아끌고는 학교 안에 있는 작은 정원으로 향했다. 정원에 도착하자마자 A는 B의 손목을 놓아주었다.

"손목은 아프지 않으셨나요?"

"안 아팠어요."

"... 할 얘기가 있어서요. 어제 그 얘기, 제가 감정 없이 가면처럼 웃는다는 그 얘기를 다른 사람한테도 했나요?"

"아니요."

"다행이네. 그럼 앞으로도 계속 그 이야기는 꺼내지 마세요. 내 앞에서도."

"...왜요? 그저 있는 모습 그대로를 말한 것뿐인데."

"영애는 정말 이상한 여자네요. 사람이 웃는 모습을 보고 그런 식으로 말하고. 아무튼 제가 할 이야기는 이거였어요."

A는 자신의 말이 끝나자마자 B에게 다시 꾸벅 인사하고는 그 자리를 떠났다. B 또한 원래 수업 준비를 할 생각이었기 때문에 A가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원을 떠났다.


그 뒤로 같은 수업을 수없이 많이 들었고 식당과 정원, 숙소로 돌아가는 복도에서 조차 둘은 한 번씩 마주쳤었다. 그때마다 둘 다 할 일이 있었기에 서로 대화는 못 나눴지만 교실에서는 어째서인지 A가 먼저 B에게 다가왔다.

"오늘 날씨가 참 좋네. 그렇지 않아요?"

"그렇네요."

"아, 오늘 힐트 교수님이 주신 과제가 꽤 어렵던데 다 하셨어요?"

"네, 다 했어요."

"......"

딱딱하게 대답하는 B에 A는 잠시 B를 빤히 바라보며 생각했다. '인형 같은 여자.', '이상한 여자', '재미없는 여자'라고만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하는 그인데 왜 친해지려고 하는 거지? 그야 당연하게도 그녀는 공작가의 딸이었으니까. 그녀가 아마 공작가의 딸이 아니었다면 친해지려고 하지도 않았을 거라고 A는 생각했다. 생각에 집중해서일까, A가 B를 너무 빤히 바라보고 있자 B는 고개를 살짝 옆으로 갸웃 숙이고는 똑같이 A를 바라보았다. A는 그제야 자신이 B를 너무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을 인지하고 "영애에게 실례를 범했네요. 죄송합니다. 잠시 생각 할 것이 있어서."라고 사과를 하였다. 사과를 전하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수업 종은 쳐버렸고 B와 A는 대화하는 것을 멈추고 똑바로 앉아 수업을 들어야 했다.

수업이 끝난 후 A가 먼저 B에게 다가가 한 가지 권유를 했다. 바로 자신의 친구들과 함께 하는 티파티에 B도 오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안.

"영애만 괜찮으면 내일 있을 다과회에 초대하고 싶은데, 괜찮나요?"

"아, 친구들과의 약속이 따로 있어서요. 다과회에는 못 갈 것 같네요."

B도 나름 아카데미 생활을 하면서 친구들을 많이 사귀었다. 자신과 함께 밥을 먹어주고 과제를 함께 하며 정원에서 수다를 떨 그런 친구들. 그런 친구들이 먼저 B에게 정원에서 다과회를 하자고 했기에 B는 수락한 약속을 깰 수는 없었다. B가 거절을 하고 자리를 떠나자 A 또한 생각보다 아무렇지도 않게 자리를 떠났다. 학교에 입학한 공작가의 자제는 B 말고도 많았으니까. 그리고 다음날 A와 B는 각자의 친구들과 함께 꽤 재미있는 티파티를 즐겼다.

다과회가 끝난 오후, 그녀는 수업이 모두 끝나고 모두가 숙소에서 잠을 잘 때 몰래 빠져나와 학교의 정원으로 향했다. 아무도 없는 정원은 조용한 것을 넘어서 개미가 지나가는 것이 들릴 정도였다. B는 정원의 분수대 쪽 벤치에 앉아서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고는

"하나, 둘, 셋-"

"밤 산책을 즐기시는 편인가 봐요?"

마치 새하얀 종이 위해 검은색 물감을 칠해둔 곳에 하얀색 반짝이는 다이아몬드를 박아둔 것처럼 보이는 작은 별들을 하나씩 세고 있을 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하기 위해서 고개를 돌려서 보면 익숙한 얼굴과 하얀색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죠? 영애 혼자 돌아다닐 시간은 아닌데."

"그냥 밤하늘을 구경하고 있었어요."

A는 점점 다가오더니 B의 옆자리에 앉고는 따라서 밤하늘을 올려다보기 시작했다. 한참이 지나도록 위를 바라보고 있으니 A는 점점 지루한 듯 보였지만 B는 지친 기색 없이 여전히 집중하여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B를 A는 바라보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요즘은 꽤 다양한 표정을 짓는 것 같더군요."

"당신은 여전히 형식적인 웃음만 짓던데요."

"하아... 당신은 정말-"

B의 대답을 들은 A는 한숨을 쉬고는 B에게서 시선을 거두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몸을 돌려 자리를 옮기려는 그가 입을 다시 열었다.

"당신은 여전히 이상하네요. 저는 이만 가겠습니다. 영애께서는 제가 데려다 드린다고 해도 거절하실 것 같으니 이번에는 말조차 꺼내지 않도록 할게요."

그렇게 A는 저 멀리 꽃들이 만개한 작은 길로 사라져버렸다.


"B는 이제 곧 졸업인데 졸업 선물로 갖고 싶은 것 있어?"

"선물이요...? 딱히 생각해본 적은 없네요. 선물이라면 어떤 것을 받아도 좋을 것 같아요."

B는 수업을 위하여 강의실로 향하는 복도에서 자신의 친구와 함께 수다를 떨며 가고 있었다. 곧 있을 졸업에 대해서 갑자기 물어보니 B는 당황 할 수 밖에 없었다. 그야 당연하게도 B는 졸업에 대해서는 생각을 안 했고 지금 현재를 즐기고 있었으니까. B는 아카데미에 입학하면서 참 많은 것이 변한 상태였다. 평소에는 딱딱한 무표정이 아닌 어느 정도 미소를 짓고 있었고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는 가끔 환하게 웃을 때도 있었다. B는 그런 표정과 마찬가지로 감정 또한 친구들과 함께 하고 싶다는 것을 느끼며 남은 학교생활을 마저 즐겼다.


졸업식이 끝난 후 B는 가문의 가주 자리에 바로 올라가게 되었다. 아카데미가 끝난 후라면 보통 정신이 없기도 하고 아직 부족한 점이 많다고 여겨서 어느 정도 시간을 둔 후 가주 자리에 올리는 것이 평범한 일이었으나 B는 가주에 바로 오를 만큼 실력이 뛰어났기에 다른 평범한 경우와는 전혀 다른 경우였다. 가문에서 지내던 B는 꽤 아카데미에서는 그다지 느끼지 못 했던 '따분함'이라는 감정을 자주 느꼈다. 식사를 할 때도 차를 마실 때도, 정원을 산책할 때조차 따분함을 느끼며 여가를 충분히 즐겁게 보내지 못 했다. B는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왜 자신이 이런 감정을 느끼고 있는 것인지. B는 그제야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소중한 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없다면 어떤 수단과 방법이든 좋으니 대화를 하는 것. B는 가문의 집사에게 말해 곧장 편지지와 편지 봉투를 준비하고 하나하나 손수 마음을 담아 편지를 써가며 자신의 친구들에게 보냈다.

'그러고 보니 그 사람은 어떻게 지내지?'

B는 편지를 모두 적고 앉아 있다가 갑자기 A가 떠올랐다. 졸업을 하면서 그와도 점점 멀어지게 되었으니 함께 대화를 할 시간이 별로 없었다. A는 그의 안부를 물을 겸 A의 가문에 편지를 하나 넣었다. 졸업을 하고 무엇을 하는지, 평소에는 어떻게 지내는지, 지금도 여전히 수다스러운지 등 여러 가지를 적어서 보내었다.

 

 

A영식에게

안녕하세요, 영식. 나를 기억하고 계실까요? 나는 한 때 당신과 함께 아카데미를 다녔던 B 아스트로 입니다. 다른 이들에게 안부 인사를 넣으며 당신의 안부도 궁금하여 이렇게 편지를 보내요. 요즘은 어떻게 일상을 보내고 계시는가요? 나는 최근에도 좋아하는 것들을 하고 있답니다. 특히 시간이 생기면 밤 산책을 가끔 나가는 중이에요. 이렇게 가주가 되면서 바빠지기도 바빠졌지만 좋아하는 것을 계속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당신도 좋아하는 것을 하며 지내고 계실까요? 당신이 어떻게 일상을 보내고 있는지 무척 궁금하네요. 이만 말을 줄이겠습니다. 답장을 기다리고 있을게요.

B

그렇게 편지를 보내자 며칠이 지나자 A에게서 답장이 왔다. 그의 편지는 따뜻하지도, 차갑지도 않은 어중간한 분위기가 가득한 글이었다. 마치 과거에 자신을 처음 봤을 때처럼 형식적으로 웃어주었던 미소처럼 편지에서는 아무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B 공작에게

이렇게 기억하고 편지를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 또한 잘 지내고 있습니다. 공작과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저는 가주 자리에 오르면서 일정이 많아진 것이 있겠군요. 아, 또 이미 들으셨겠지만 한 가지 소식을 전하자면 백작이 아닌 후작가가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할 일이 많아져서 답장을 쓰는 것이 늦어졌군요. 저와 다르게 공작님께서도 친구분들과 즐거운 시간을 많이 보내고 계신 것 같아서 다행입니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저도 나름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 하실 것 없습니다. 그렇기에 이렇게 편지를 보내주실 필요도 없고요. 편지를 보내는 것이 공작님께 폐가 될까 염려됩니다. 그럼 저도 이만 말을 줄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그 이후로 편지를 보내도 답장은 그저 똑같은 말만 반복했지만 내 기분만 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최근에 정세가 나빠져서 그런가? 황제가 최근에 평민층을 제대로 돌보지 않고 우리 귀족들과도 회의에서 다툼이 잦다고 하니 어쩌면 그것 때문에 일을 더 한다고 바쁜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여 크게 걱정은 하지 않았다. 곧 나라의 정세도 원래대로 돌아올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지금 상황을 겪고 나니 그게 얼마나 바보 같은 생각이었고 걱정을 해야 했다.


"오랜만입니다. 이렇게 볼 줄은 몰랐군요."

"다친 곳은 없나요? 대체 왜..."

"당신이 지금 남을 걱정 할 때인가? 제 걱정은 필요 없으니 신경 끄는 게 좋겠군요."

수도에서 다시 만난 둘은 서로가 웃으며 다시 마주 할 수 없었다. B는 예전과 다르게 이제는 형식적인 인사조차 해주지 않는 그와 마주하니 어찌 해야 할 줄 몰랐다. 당연하게도 서로가 적군인 상태였으니까. B는 자신을 보자마자 모진 말을 하는 A에게 거침없이 다가갔다. 자신의 소중한 친구이고 다친 곳이 있다면 치료를 해주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B가 다가오자 A는 인상을 찌푸리며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꺼내 들어 그녀에게 겨뤘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능력을 써서 주변에 거대한 가시가 돋친 꽃들을 피워내었다.

"죽고 싶은 거라면 여기서 죽여드리죠."

"... 한 번이라도 좋으니 다친 곳을 확인하면 안될까요?"

B는 A가 검을 들고 있어도 계속 다가가기 시작했다. 그녀에게는 자신의 친구가 안 다치는 것이 우선이었고 다쳤다면 치료를 해주는 것이 자기 일이라고 생각했으니까. A에게 가까이 다가갈수록 B는 점점 검에 가까워졌고 이내 검에 쓸려서 목에서 피가 났다. 하지만 그 상처는 금세 아물어버렸다. 그녀가 가진 능력 때문에 상처조차 쉽게 낼 수 없는 것이었다. A는 아카데미에서 봤던 B의 능력을 떠올리고는 이러는 것은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여 검을 다시 집어넣고 만들어낸 꽃조차 다시 없애버렸다. 하지만 검과 위험한 꽃을 집어넣은 대신 입이라는 도구로 그녀를 상처 입히려고 했다. 사람에게는 신체에 상처를 내는 것 말고도 정신적으로도 공격할 수 있는 방법이 있었기에 그는 그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당신이 대체 뭐길래 치료하려고 하는 겁니까? 정부군인 네가 왜 혁명에 가담하는거지? "

"그 잘난 능력으로 차라리 돈을 벌어서 이 나라를 떠나는 것은 어떤가요? 당신이라면 돈은 잘 벌 것 같은데. 어차피 모두가 당신의 능력을 이용하려고 할 뿐 지금으로서는 당신을 좋아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 멍청한 감정으로 언제까지 이딴 짓을 하고 계실 겁니까?"

그는 계속 그녀에게 모진 말을 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아니,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할 말이 끝나고 자신의 말을 들어줄 때를. 하지만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는 곧장 검을 꺼내 들고 반대편으로 뛰어가 버렸다. 그녀의 말은 듣지도 않은 채로.


"A! 더는 무리입니다! 모두 지친 상태에요. 시간을 지체할수록 모두가 힘들어질 뿐입니다. 빨리 준비를 하셔야..."

그는 같은 혁명군의 말을 듣고 진행하던 계획을 다시 생각해야 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숙청을 하고 있으니 모두가 지쳐가며 이 사실이 황제의 귀에까지 들어가자 군사들이 모두 혁명군을 찾고 있었다. 그는 잠깐 생각을 하는가 싶더니 이내 모든 사람들을 불러 모아 황제가 있는 궁으로 향했다. 그가 황궁으로 향할 때조차 은화는 그가 다치질 않기를 바라며 자신의 친구를 치료하는 것에 열중했다.


"오늘부로 후작인 A 카메리아는 북쪽에 있는 영지에서 영지민들을 돌보며 살아야 할 것이다! 이 처벌에 이의 있는 사람이 있는가?"

A는 황제의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채 앉아있었다. 결국 혁명군에 소속된 A가 잡히며 이 전쟁은 황제가 승리하게 되었다. A는 전쟁의 패배로 결국 북쪽에 잇는 작은 영지로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언제나처럼 혼자 쓸쓸하게 지내며 영지민들을 돌봐야 했다. 하지만 그는 아무 말 없이 묵묵하게 그것을 받아들일 뿐이었다. 아니, 혁명군 모두가 자신이 살아있는 것에 감사하여 따랐지만 단 한명만이 그것을 인정하지 못 했다. 그것도 정부 쪽 사람인 B가. 하지만 공작인 그녀도 황제의 말은 거스를 수가 없었기에 어찌 할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그녀는 그가 병사들에게 이끌려 북쪽 영지로 가는 것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안녕하세요. 그때 다친 곳은 잘 치료하셨나요?"

"잠, 잠깐. 영애가 여길 어떻게...?"

"예전에 당신과 아카데미를 다닐 때 배웠던 마법이죠. 쓸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이런 곳에 쓰이네요."

B는 아카데미에서 배웠던 마법들을 A의 영지에 몰래 들어올 때 요긴하게 썼다. 원래는 이런 곳에 쓰라고 배운 것이 아닐 텐데도 B는 이제는 'A를 만날 수 있다면 상관없겠지.'라고만 생각하며 마법을 써서 그가 있는 곳으로 단숨에 이동하였다. 그렇게 이동하자 보이는 것은 자신을 전쟁 때 마주쳤을 때처럼 무섭게 노려보는 A가 있었다. B는 그동안 걱정하던 심정이 다 터져 나와 지금이라도 달려가서 다가가 뭐라도 해주고 싶었지만 그가 자신을 노려보며 멀리 떨어졌기에 가까이 다가갈 수가 없었다.

"당장 나가요."

"하지만-."

"당장 꺼지라고 했어요. 당신이랑 할 얘기 없으니까."

그리고 그는 밖에 있는 경비병들과 고용인들을 불러 B를 강제로 끌고 갔고 B는 그런데도 A에게 말했다.

"내일 다시 올게요...! 그럼 내일 봐요, A."

B는 사용인들에게 끌려가 영지의 문밖으로 쫓겨났다. B는 어떻게 해서든 다시 들어가고 싶었지만 아까 보았던 A의 무서운 표정과 사용인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저택으로 돌아가 계획을 세웠다. 어떻게 하면 A가 그때 처처럼 웃어줄지.

B는 다음날도 A에게 말한 대로 그를 찾아갔다. 이번에도 웃으며 그를 만나러 갔지만 반대로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자신을 적대하였다. 전쟁 당시의 기억 때문에 많이 힘들 거라고 생각한 B는 그가 최대한 나쁜 기억은 떠올리지 않도록 다른 주제를 꺼내어 그와 얘기를 하려고 시도하였다.

"오늘 날씨가 무척 좋아요. 밖에 나가보셨어요?"

"당신처럼 멍청하게 꽃구경이나 할 나이는 지났습니다."

"그래도 꽃 구경도 나름 재미있지 않나요?"

"재미없는데."

"음... 그럼 다음에라도 좋으니 날씨가 좋고 화창한 날에 맛있는 것을 먹으러 가요."

"싫어요."

"앗, 그럼-."

"하..."

B는 모진 말에도 웃으며 그에게 말을 건넸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한숨뿐이었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먼저 나온 말은 "더 이상 찾아오지 마세요. 빨리 내 눈앞에서 사라져요."라는 말. A는 오늘 또다시 B를 쫓아냈고 B를 쫓아내는 병사들은 이제는 B에게 친밀감을 느끼고 있었다. "아이고, 공작님. 오늘도 안 지치세요? 엄청 끈질기시네요~!" 라고 할 정도였으니. 그렇게 그들이 함께하는 일상은 반복되었다. B가 몰래 영지에 들어가면 A가 그녀를 쫓아내는 일상. 너무 자주 찾아간 탓일까? 이제는 영지민들 조차 B를 알고 있었다. 아는 것을 넘어서 그녀에게 부탁을 할 정도였으니까.

"제발 저희 영주님 좀 챙겨주세요. 영주님께서 항상 화가 나신 상태라 저희가 어떻게 말도 못 드리겠습니다. 오죽하면 안 울기로 소문난 꽃집 딸도 영주님을 뵙고는 울었는걸요. 게다가 외부인을 못 들어오게 하시니 가게도 망하기 일보 직전입니다. 거래 할 곳도 알아보질 못 하니까요!"

그런 영지민들의 말을 들은 B는 더욱 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게다가 이렇게 부탁을 해오는데 어떻게 거절을 하겠는가? 그녀는 그런 영지민의 말을 듣고 오늘도 A를 만나기 위해서 그의 방으로 갔다.

"제가 찾아오지 말라고 몇 번을 말했어요, 좀! 그 멍청한 머리는 기억조차 못 하는 거야?!"

그녀가 그의 눈앞에 나타나자마자 그는 소리를 질렀다. 자신이 나타날 때마다 하는 말인 나가라는 말을. 소리를 지르는 그를 아랑곳하지 않고 이번에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말했다.

"이번에도, 다음에도 계속 올 거예요. 아무리 당신이 쫓아내도 계속 당신을 만나러 올 거예요."

"허..."

그녀의 말에 기가 찬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에게 되물었다.

"대체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뭡니까? 대체 뭘 원해서 이렇게 매일 질리지도 않고 찾아오는 겁니까?!"

"친구요. 그것도 정말 소중한 친구."

"그딴 우정 따위 언제든지 깨질 수 있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저는 A와의 우정은 깨트릴 생각 없어요."

"그걸 거짓말이 아니라고 어떻게 믿죠?"

그는 계속 B를 밀어내었다. B가 아무리 그에 대한 사실을 말해도 그는 그것을 믿지 않고 그저 그녀를 밀어내기만 할 뿐이었다. 그렇게 오늘도 그에게 모진 말을 듣고 돌아오는 B였다.


"...오늘은 밖에 같이 나가는 것 어떤가요?"

"정말요?"

오늘은 B가 A의 방에 들어오자 보이는 것은 어째서인지 외출복을 입고 밖에 나갈 준비를 하는 그가 눈에 들어왔다. 그도 그녀가 온 것을 알아차렸는지 뒤를 돌아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오늘은 같이 외출을 하는 건 어떤가요."

"좋아요."

평소 자신을 적대하며 피하던 그와는 다르게 오늘은 오히려 예전처럼 자신과 함께 하길 원하는 그라서 B는 싱긋 웃어 보였다. 그녀는 그가 드디어 자신에게 마음을 열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와 그녀는 영지 내에서 여러 곳을 둘러보았다. 우선 평소 공작가의 자제였기에 평민들이 다니는 시장에 대해서 볼 기회가 없었던 그녀를 위해서 시장을 함께 둘러보며 맛있는 것을 먹거나 장신구를 구경하였다. 맛있는 것이라고 해도 조미료가 잔뜩 들어간 불량식품에 장신구라고 해도 싸구려 돌로 가공된 볼품없는 장신구였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것조차 신기한지 눈을 떼지 못하고 구경하고 있자 그가 팔찌를 사주며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이 팔찌가 마음에 드시나요? 그럼 제가 사드리죠. 단, 앞으로 찾아오지 않는다는 조건으로요."

"사양할게요."

그녀는 그의 제안을 듣자마자 딱 잘라서 거절했다. 그녀에게는 이런 팔찌보다 그를 챙기는 것이 더 중요했기에 고작 팔찌 하나로 그런 거래를 할 수는 없었다. B의 말을 들은 A는 '역시 안 먹히는군.'이라는 표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그럼 역시 여기서 꺼지시죠. 거래를 할 생각이 없다면 이쪽도 영애와 할 얘기가 없습니다."

그렇게 그는 그녀를 홀로 시장에 내버려 둔 채 자신의 저택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예전이었으면 아무리 그녀가 마법을 쓸 수 있어도 데려다주려고 했겠지만 지금은 그녀 혼자 잘 갈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했고 그녀를 챙기고 싶지 않았기에 그대로 두고 홀로 가버린 것이다. B는 그가 천천히 자신의 곁에서 떨어지는 것을 바라보기만 할 뿐 그를 붙잡지는 못 했다. 그를 다시 붙잡으면 또 그가 자신을 싫어하고 피곤해할 테니까. 그녀는 자신의 친구가 싫어하는 짓은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매일 찾아오고 돌아가기를 반복하다 보니 결국 오늘 일이 터지고 말았다. 하필 오늘은 그의 상태가 더욱 안 좋았었는데 그녀는 상태가 안 좋은 그를 치료하려고 가까이 다가가니 그는 참다 참다 결국 그녀를 공격하고 말았다. 그의 능력이 꽃을 자라나게 하는 능력으로. 다른 사람들은 꽃을 피워낸다고 하면 보통은 그저 눈에 아름답기만 한 관상용 꽃을 생각하겠지만 그는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 가시가 달린 꽃이나 독이 있는 꽃조차 피워내게 할 수 있었기에 사람을 공격하는 일 따위가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그가 마법을 써서 날카롭고 거대한 장미 가시를 만들고는 그 가시가 그녀의 다리와 팔을 뚫어버렸다. 팔과 다리에서는 피가 쏟아져 내리고 가시는 팔과 다리의 살을 뚫어 뒤에서 봐도 가시가 그대로 보일 정도였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오히려 공격을 한 그가 당황해버렸다. 서둘러 만들었던 가시를 빼주었지만 크게 놀랐는지 숨을 고르게 쉬지 못 하고 안색까지 창백해졌다. 그녀가 그를 안심시키려고 가까이 다가가려고 하자 그는 크게 소리쳤다.

"제발 오지 마요! 제발, 제발 부탁이니까..."

그는 거의 애원하듯이 B에게 소리쳤다. 제발 오지 말아 달라고. A의 그런 모습에 B는 잠시 그를 바라보더니 이내 다리와 팔에 있는 상처는 아프지도 않은지 그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리고는 그를 있는 힘껏 끌어안고 말했다.

"괜찮아요. 난 괜찮으니까 진정해요."

그녀의 다정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에 그 또한 B를 끌어안으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A가 B를 끌어안자 그녀는 A의 등을 여러 번 쓸어내리며 그가 더욱 빨리 진정할 수 있도록 도왔다. 하지만 그런데도 진정하지 못 하고 숨을 헉헉거리는 A에 B는 손은 그의 등을 쓸어내리며 입은 그에게 다정한 말을 내뱉었다. "괜찮아요. 난 괜찮으니까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쉬어봐요. 그러면서 우리 같이 천천히 진정해봐요." 그렇게 한참을 서로가 끌어안고 있었을까? 그가 정신을 차리고 천천히 그녀에게서 떨어지며 그녀에게 영지에서 치료하고 갈 것을 권유했다.

"제가 다치게 했으니 책임은 지도록 하죠. 그러니까 오늘은 떠나지 말고 잠시 영지에 있다가 가."

"앗, 내가 치료 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너무 무리해서 챙기실 필요-"

"오히려 영애를 안 챙기는 게 더 불편하니까 있다가 가요. 손님방도 많으니 거기서 상처가 아물 때까지 지내도록 하고요."

"정말 괜찮은데..."

"제가 안 괜찮다고 분명 말씀드렸습니다."

그는 다시 한번 그녀의 말을 단호하게 무시한 채 사람을 불러 그녀를 치료하고는 자신이 직접 손님방으로 안내했다. 저녁에는 그녀의 입에 맞도록 음식도 여러 가지를 준비하며 자신 또한 한동안 안 하던 식사를 오랜만에 한 순간이었다. B도 A가 밥을 굶지 않고 먹는다는 것이 안심이 되었기에 그의 맞은편에 앉아서 조용히 식사를 했다. 식사가 끝나자 B는 피곤하기도 하고 피로가 쌓여서 씻고 싶다며 먼저 손님방으로 올라갔다. A 또한 따로 할 일이 없었기에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앉아 오늘 있었던 일을 생각했다. 자신도 모르게 그녀를 공격하고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을 안아주었다. 그 순간 그녀가 정말 따뜻하게 느껴지면 곁에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마치 연인으로서 그녀를 통제하고 자신의 옆에만 있도록 가두어버리고 싶은 감정이...

"뭐? 이게 대체..."

A는 혼란스러웠다. 지금 느끼는 감정이 대체 무엇인지도 몰랐으며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으니까. 그는 생각했다. 이런 위험한 감정이 무엇이고 자신이 왜 이런 감정을 가졌는지. 하지만 어리석게도 그는 생각 할 것도 없었다. 그가 느끼는 감정은 '사랑'이라는 감정이었으니까. 보통 사람이라면 '사랑'이라는 감정은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는 마음이 가득할 것이다. 하지만 그의 경우에는 조금 달랐다. 그녀가 행복했으면 하는 것도 맞지만 자신 또한 그녀의 옆에서 행복하길 바랬으니까. 그녀가 자신의 옆에서만 웃어주길 바랬고 자신만을 바라봐주길 원했다. 다른 사람을 향해서 웃어주면 아마 그는 질투에 눈이 멀어 무슨 짓을 벌일지 조차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는 항상 자신의 곁에 있어 주고 자신을 생각해주는 그녀가 미치도록 사랑스러웠고 자신의 곁이 아니면 안될 것 같았다. 그녀를 바라보면 누군가 심장을 세게 쥐고 있는 것처럼 아팠고 다른 이와 함께 있는 것은 상상만 해도 치가 떨릴 정도이니...

"하... 하하, 이딴 위험한 감정이 사랑이라니."

그는 결국 자각한 것이다. 자신은 B를 미치도록 사랑하고 있다고. 아니, 그녀를 위해서라면 미치는 것 또한 가능했다.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이 미치길 원한다면 기꺼이 미치고 죽길 원한다면 기꺼이 죽어줄 것이다. 물론 그녀라면 자신이 죽길 바라지 않겠지만. 그는 그날 밤 자신의 마음을 인지하며 그녀에 대해서 생각하며 밤을 지새고 그녀를 어떻게 잡아둘지 또한 생각하며 다음날을 기대하고 있었다.

다음날, 그는 곧장 B와 아침 식사를 가졌다. 어제저녁과 마찬가지로 그녀가 좋아할 만한 음식들을 준비하여 그녀가 일어날 시간에 맞춰서 음식이 들어오도록 지시하는 지나치게 섬세한 모습마저 보여주는 기행도 펼쳤으니까.

"좋은 아침이에요, A. 오늘은 몸 상태가 괜찮나요? 어제 많이 놀란 것 때문에 잠은 자지 못 한 것 아니죠?"

"나도 좋은 아침, B. 몸 상태는 괜찮아요. 놀란 것도 덕분에 진정하고 푹 잘 잤으니 걱정하지 말고요.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어제 말한 대로 영애의 상처가 다 아물 때까지 영지를 편안하게 둘러볼 수 있도록 준비해놨어요."

그는 그녀가 상처가 아물 때까지는 이곳에서 지내도록 유도했다. 상처가 다 아물었을 때는 다른 핑계를 만들어버릴 계획까지 세워뒀고. 그가 마음속으로 수상한 미소를 짓고 있을 때 B는 차려진 식사를 맛있게 해치우고 있었다. 그가 무슨 계획을 세웠는지 꿈에도 모른 상태로.

둘은 아침 식사를 마친 뒤 각자 외출 준비를 하여 저택의 정문에서 다시 만났다. 그녀는 그가 준비해준 드레스로 예쁘게 꾸민 상태였다. 드레스는 그녀의 머리색과 맞춘 것처럼 노란빛, 아니 금빛으로 은B게 반짝거리고 움직이기 편하도록 무릎까지 오는 짧은 드레스에 그녀의 눈동자를 그대로 뽑아서 만든 것처럼 보랏빛이 영롱한 자수정들이 박힌 목걸이를 하였다. 평소 입는 드레스와는 다르게 많이 심플하게 꾸며진 드레스가 오늘 그녀가 어디로 놀러 갈 것인지 보여주었다. 드레스와 장신구는 그가 그녀를 생각해서 준비한 것치고는 참 그의 취향이 보이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또한 B가 입은 것과 마찬가지로 여러 금빛 장신구로 꾸며진 은은한 보랏빛 망토를 셔츠와 함께 두른 상태였다. 마치 자신 또한 B와 똑같이 커플로 맞춘 것처럼. 둘은 오늘도 저번 데이트 때처럼 시장을 먼저 둘러보았다. 저번에 먹었던 불량 식품도 한 번 더 먹어보고 이번에는 B의 장신구가 아닌 A의 장신구를 찾아보았다.

"이번에는 내가 사드릴게요. 영지에 지낼 수 있도록 해주셨으니까요."

"손님을 대접하는 건 당연한 일인데. 정말 괜찮나요?"

"괜찮으니까 편하게 받아주세요. 아, 이 브로치 예쁘네요. A는 어떤 거 같아요?"

그녀가 고른 것은 주황색 시트린이 박힌 소박한 브로치. 애초에 시장에서 파는 것이라 귀족들이 평소 전문적인 사람을 불러서 사는 것보다는 퀄리티가 많이 낮았다. 하지만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주는 것인데 뭐가 안 예쁘겠는가? A는 그녀가 길거리에 널브러진 돌멩이를 줘도 좋다며 방에 장식 할 것이다. 그녀가 모처럼 사준 브로치는 소중하게 저택으로 모셔질 예정이었다. 아마 그 브로치는 고급스러운 케이스 안에 보관되면서 A가 그 브로치를 쓰는 것은 그녀의 앞에 설 때뿐일 것이다. A는 B가 보지도 않는데 소중한 브로치를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마치 어린 아이가 자신의 동생에게 장난감을 뺏기기 싫어서 자신만 아는 비밀 장소에 숨기는 것과 똑같았다. 그 브로치가 저택을 향하는 동안 둘은 밖에서 마저 놀다가 저택으로 돌아갈 예정이었고. 이번에는 그가 연극을 보는 것을 추천했다. 그녀도 연극은 생소하기도 했고 궁금했기에 그를 따라서 연극이 하는 건물로 향했다. 그는 미리 연극 티켓을 사람을 시켜서 사뒀기에 둘은 빠르게 입장 할 수 있었다. 안은 B의 생각과는 다르게 어두운 상태였기에 꽤 놀라 자신의 자리로 가는 동안 넘어지지 않도록 천천히 걸어갔다.

"잡으세요. 아까 선물해주신 브로치에 대한 답례."

"아, 감사합니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그가 먼저 앞장서면서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B는 자신을 챙겨주는 A에 '이제 정말 친구로 받아들여 줬구나.'라고 생각하며 자리로 향했다. 자리에 앉아서 연극을 보고 나오니 생각 외로 시간은 빠르게 흘러간 상태였다. 연극의 내용은 연인이었던 남녀를 방해하는 악녀와 여러 가지 역경들을 함께 물리쳐가며 사랑을 지키는 그런 뻔한 이야기였다. A는 너무 뻔한 이야기에 지루하게 느꼈지만 B는 그런 뻔한 이야기조차 재밌었는지 연극 내내 눈을 반짝거리며 감상을 했다. 연극이 끝나고 해가 질 무렵에서야 둘은 그렇게 다시 저택으로 돌아오며 일과를 마칠 수 있었다.

그 뒤로 둘은 시간이 생길 때마다 시장과 연극을 구경하러 갔고 가끔은 그녀가 영지에서 가고 싶어 하는 곳을 데려가 주기도 했다. 둘은 계속 붙어 다니며 함께 시간을 보내지만 어째서인지 A는 조금 지쳐 보이기도 했다. 그가 그녀에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해도 그녀는 오직 '친구'로만 인식하고 있었으니까.

"B, 저번에 드린 목걸이는 어떤가요? 당신이 생각나서 그걸로 골라봤는데."

"앗, 고마워요! 이렇게 멋진 선물을 받을 수 있어서 정말 기뻐요."

"B, 이번에 본 연극 속 주인공이 마치 우리와 비슷하지 않았나요? "

"비슷했었나요...? 아, 둘이 사이가 좋아 보이는 것은 똑같네요."

이런 식으로 대화를 수도 없이 반복하고 있자 A도 눈치가 없는 B가 조금 힘들어졌지만 그럼에도 좋아하는 마음은 여전했기에 그녀에게 계속 다가갔다. 계속 이렇게 표현하다 보면 그녀도 자신의 마음을 알고 받아줄 것이라고 상상하며.


함께 여러 일상을 보낸 다음날, B는 A가 자신을 먼저 찾기 전에 자신이 먼저 A에게 갔다. 이제 상처도 다 아물었고 체력도 좋다 못해 날아갈 정도였기에 떠날 수 있다고 판단하고 그에게 작별 인사를 하려고 온 것이었다. 그가 있는 집무실에 들어가자 여러 가지 서류로 쌓인 산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가 책상에 있는 서류에 무언가를 적는가 싶더니 이내 자신을 보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천천히 다가왔다.

"무슨 일이죠? 이렇게 먼저 찾아오고."

"이제 슬슬 영지로 돌아가야 할 것 같아서요. 가기 전에 A에게 인사도 하고 마차를 빌려야 하니까요."

"떠난다고요...?"

A는 심장이 내려앉았다. 그동안 그녀의 입에서 '떠난다'라는 말이 나오지 않도록 계획까지 세워가며 그녀를 붙잡았는데 결국 영지에서 나간다는 말을 하니 그로서는 심장이 내려앉을 수 밖에 없었다. 그는 표정이 굳은 상태로 한참을 있었을까 B가 "A...? 어디 아파요?"라고 묻자 그제야 정신을 차리며 그녀에게 웃어주었다.

"마차는 빌려드릴게요. 언제 떠나실 생각이신가요?"

"오늘 점심을 먹은 후 오후에 떠나려고 해요."

"그럼, 떠나기 전에 점심은 함께 먹도록 해요."

A는 떠나기 전 마지막까지 B를 보고 싶었기에 그녀가 떠나기 전까지는 계속 옆에 붙어있을 생각이었다. 그녀가 정원에 산책을 간다면 따라 나가고 다과를 즐기면 함께 차를 마셨다. 그리고 함께 저녁을 먹으며 대화를 나누다보니 어느새 그녀가 떠나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 그녀와 함께 저택에서 나와 마차가 있는 곳으로 향하면 그녀의 짐들이 마차에 실리고 있었다. B는 A를 바라보며 싱긋 웃어 보였다.

"정말 즐거웠어요. 우리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다시 만나요. 편지도 할게요."

"잠, 잠시만요. B."

"왜 그래요?"

"... 좋아해요."

그는 그녀의 손을 붙잡은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를 괴롭히던 감정을 마침내 그녀에게 제대로 표현한 것이다. 그는 지금 자신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조차 모를 정도로 굉장히 떨고 있었다. 그녀는 그런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잠시 생각하는가 싶더니 이내 입을 뗐다.

"나도 어제 연극 정말 좋았어요. A도 좋았다니 다행이네요. 또 이런 추억을 만들 수 있길 기대할게요. 잘 지내요, A."

웃어보이며 말을 마친 그녀는 결국 마차에 올라탔다. 그 마차는 B가 타자마자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고 A의 눈앞에서 점점 멀어져갔다. 멀어져가는 마차의 주인은 A의 것이었지만 그는 도저히 그 마차를 잡을 수가 없었다. 자신은 그 마차를 잡을 자격이 안 되었으니까. 그렇게 그는 B가 떠나고도 한참은 그 자리에서 멍하니 있다가 저택의 사람이 감기에 걸린다며 담요를 들고 왔을 때야 정신을 차려서 저택을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계속 그녀를 사랑할 것이다. 어쩌면 그 감정을 지우지 못 해서 상사병이 걸릴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동안 그녀에게 했던 짓을 생각하면 그녀는 그를 친구로만 여기고 있는 것도 감사하게 여겨야 했다. 그는 몇 날 며칠을 잠을 못 자 그녀와 아카데미의 정원에서 마주쳤을 때 회상했다. 그녀는 밤하늘을 바라보며 하늘에 떠 있는 별들의 숫자를 세고 있었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잠이 안 오면 양을 세며 잠이 들었겠지만 지금의 그에게는 양보다는...

'나도... 똑같이 하면 편하게 잘 수 있으려나.'

그는 그녀를 따라서 밤하늘에 떠 있는 별들을 세기 시작했다. 별들을 헤아리다 보니 뭐가 더 빛나는 별인지, 어떤 것이 더 눈에 띄지 않는지 알게 되면서 그는 결국 자신의 눈에 보이는 모든 별을 다 헤아리고 나서야 겨우 잠이 들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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